"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는 명언을 남긴 전설적인 디자이너 샤넬이 있다.
그녀의 어린시절은 아빠에 의해 고아원에 버려져 자란후 직업학교를 거쳐 디자이너가 된다.
샤넬이 고아원에서 자라 전설적인 디자이너가 되기까지의 과정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코코 샤넬' 어린시절 스토리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1883년 8월~1971년 1월 사망)
1883년 8월 19일 프랑스 소뮈르에서 태어나 성심회 수녀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샤넬 어린시절
1883년 8월 19일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출생
코코 샤넬은 2남 3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빠는 외도를 일삼았고,가난에 시달리던 샤넬의 엄마는 어린 나이에 사망하게 된다.
유년시절
유흥에 빠져 지냈던 '장돌뱅이' 부친은 아내가 숨지자 12살의 샤넬을 고아원에 맡기게 된다.
함께 위탁된 언니·동생과 달리 샤넬은 수녀원의 엄격한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기숙 비용을 지불하는 '유료 원생'과 달리 자신과 같이 '무료 원생'을 차별했던
수녀들에게 반감을 품게 되며 원생들은 수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게 관례였지만 ,
샤넬은 절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녀들은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샤넬에게 간식을 못 먹게 하거나
성경 구절을 베껴 쓰는 벌을 내렸다고 한다.
샤넬(고아원 생활)
"모든 걸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그때 나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녀원 생활중 영감
샤넬은 수녀원 생활중 인근 수도원의 바닥 문양인 주교관·지팡이·별·달·해 등을 보면서
많은 영감을 받으며 그녀가 만든 명품 브랜드 '샤넬 디자인'에 절제와 화려함이 공존하게 만든다.
브랜드의 상징적인 장식인 새하얀 '동백꽃', 우아하고 세련되며 여성미,'군더더기' 없는
절제된 디자인은 엄격함이 요구됐던 수녀원에서의 생활이 어쩌면 샤넬의 어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인해 디자인에 반영했다라고 오늘날 말한다.
수녀원 생활이 그녀의 패션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하고 볼 수 있다.
앙리 지델('코코샤넬' 일대기 저자)
"수도원 바닥 조약돌에 새겨진 문양을 관찰하며 샤넬은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못 했겠지만, 당시 생활은 미래의 성격과 심미안에
이르기까지 샤넬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샤넬은 고아원을 거쳐 직업학교에서 생활한 뒤 의상실에 취업한다.
1902년 의상실 취업
19세 나이로 귀부인에게 상품을 판매하고 기성복을 수선했다.
밤에는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요즘 말로 '투잡'을 했다.
술집 손님들은 샤넬에게 '코코(CoCo)'라는 애칭을 붙였다.
샤넬은 성공한 후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본명 대신 코코 샤넬이라 부르는 걸
죽을 때까지 아주 싫어했지만 미국에 그렇게 알려져서 결국 이름이 굳어버렸다고 한다.
샤넬은 코코의 영문자 'C' 2개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붙여 훗날 브랜드 로고로 사용한다.
우리가 아는 '명품' 샤넬 로고는 동네 술집에서 탄생한 셈이다.
'코코(CoCo)' 애칭
샤넬이 자주 부르던 'Ko Ko Ri Ko'와 'Qui qu'a vu Coco dans le Trocadero'라는
노래의 가사에서 따온 예명이다.
1909년 여성용 모자 가게 오픈
샤넬의 남자친구가 후원자로 나서며 여성용 모자 가게를 파리에 열게 된다.
이후 이 둘의 사랑이야기는 '러브 스토리'라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당시 문을 연 파리 매장은 훗날 샤넬의 모태가 되는 매장이 되어 '샤넬제국'이라 불리며
2022년 이 매장에서만 111억달러(약 13조원) 규모의 매출을 올리는 기염을 토한다.
당시 파리 패션계는 값비싼 모직 천으로 제작됐으며 강렬한 색감·무늬·주름·장신구가
눈에 띄게 만든 예술 작품 같은 화려한 의상이 대세였다.
샤넬은 모자에 이어 의류에도 도전해 본격적으로 명품 사업을 시작하게 되는데,
샤넬은 여성들 옷에 부착된 장신구 화려한 의상이 모두 불필요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샤넬
"럭셔리(명품)는 입기 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명품이 아니다"
'저지' 드레스
샤넬은 남성 속옷 소재인 '저지천'으로 만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무릎 근처까지 올린 치마 길이의 단색 드레스를 내놓게 된다.
'코르셋 장식이 달린 채 바닥에 질질 끌릴 것만 같은 길이의 치마'로 멋을 내던
귀족사회 패션에 반기를 든 셈이다.
파리 패션계 기득권자
"부자들에게는 불필요한 옷"이라며 샤넬 제품을 평가절하를 했다고 한다.
'탈코르셋 운동'(여성주의 운동)
저지천은 신축성이 뛰어나 착용감은 물론 활동성도 좋아서 '타깃층' 여성들은
열광하게 되면서 학자·사업가·운동선수 등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지갑을 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 진출이 활발했던 여성들이 입기 딱 좋았기 때문에 ,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제품이면서 ,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패션이었다.
당시에는 여성은 '승마용 스커트'를 입어야만 했는데, 샤넬은 패션업계 최초로 여성용 바지도
만들게 되면서 여성용 승마 바지도 최초로 선보이게 된다.
'페미니즘의 우상'
'지금 당신이 입은 옷은 가짜 샤넬이다'
'페미니즘의 우상(icon)'
샤넬은 '탈코르셋'의 필요성을 세상에 알린 선구자이며 '페미니즘의 우상(icon)'이기도 하다.
샤넬은 '여성성'을 파고들어 탐구한 디자이너였으며 남성의 도움에 의존하는 여성을 비난했다.
그녀는 이상적인 여성상은 '꾸밀 줄 아는 여성이 내면도 가꿀 줄 안다'라고 생각했다.
샤넬
"여성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닌 자신의 가치에 걸맞은 나이를 갖는다"
샤넬의 극적인 삶
'정부'(情婦)로 살던 시절 영국 사업가 아서 에드워드 카펠을 만나 열렬히 사랑했으며 ,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의혹을 받아 ,
그녀의 이름은 유럽 사회에 금기어로 지금까지도 취급되고 있다.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노동자들과도 격렬하게 갈등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노동자 파업으로 이어져 샤넬은 15년간 패션계를 떠나 있게 된다.
세월의 길이 만큼 서서히 샤넬 그녀의 이름은 점점 잊혀져 갔다.
2. 샤넬 15년만의 복귀
1954년 2월 그녀 나이 71세 때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샤넬)은 지난 15년간 패션계를 떠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점점 잊혀가고 있었고 그녀를 기억하는 이조차 '한물간 디자이너'쯤으로
여겨가고 있었다 , 당시 패션 잡지에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세계 패션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디자이너들의 극적인 삶을 매주 한편씩 소개하게 되는데 , 유행에 민감한
패션인만큼 유행을 좇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디자이너들이 소개하게 된다.
이 당시 디자이너들의 당대의 편견과 맞서며 기성 패션계에 도전하는 글을 접하게 된
샤넬은 자택 소파에서 패션 잡지를 보다가 주름이 깊게 팬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샤넬은 난간 2층에 서서 초초하게 담배를 피우며 복귀를 결정하게 된다.
샤넬(71세)
"질질 끌리는 스커트(당시 유행 디자인)는 마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제작된 제품 같다. 이런 옷들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샤넬 복귀현장
기자·평론가·업계 종사자 그녀의 복귀 현장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2,000여 명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박수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파리 일간지 콩파(표제)
‘1930년 촌구석에 살고 있는 코코 샤넬의 집에서'
파리 일간지는 그녀의 복귀작에 대해 유행에 한참 뒤처졌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샤넬(71세)
"두고 봐. 난 다시 시작할 것이다"
샤넬은 71세에 복귀해 파란을 일으키며 '코르셋' 부순 페미니즘으로
불멸의 스타일로 현재까지도 각광을 받게 된다.
'탈코르셋' 디자인
"거추장스러운 패션 스타일에서 여성을 해방시켰다"
샤넬은 거짓말처럼 15년만에 복귀하며 파리 패션계는 술렁였다.
샤넬은 기득권 패션계를 상대로 마지막 '도전'과 '도발'을 선언하게 된다.
유럽이 아닌 미국에서 샤넬의 패션을 알아봤다. 미국인 바이어들이 앞다퉈 그의 출시 제품을 사들였다.
앙리 지델('코코 샤넬' 저자)
"샤넬을 알아주는 나라는 프랑스나 영국이 아니라 미국이었고, 이번엔 미국인들이
유럽을 움직여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준다"
◇'패션은 변해도 스타일은 영원하다'…
불멸의 이름으로 남은 샤넬은 그 다음 해 '샤넬 2.55백'을 선보이게 된다.
짧은 손잡이만 달렸던 기존 여성 가방과 다른 디자인이었는데,
가방에 체인을 달아 여성들에게 '양손의 자유'를 부여한 것이였다.
미국 라이프지
"유행을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라 혁신을 일으키고 있다"
샤넬(복귀 이유)
"왜 다시 일을 시작하느냐고요? 쉬는 게 지겹다는 것을 깨닫는 데 15년이 걸린 거죠.
이제는 허무에 빠져 있기보다 차라리 실패하는 편이 낫거든요."
1971년 1월 샤넬 사망
영면에 들면서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그녀는 모처에서 다음 컬렉션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패션은 변해도 스타일은 영원하다'는 그녀의 말처럼 샤넬은 불멸의 스타일로 남았다.
3. '코코 샤넬' 명언
"여자라면 두가지를 갖춰야 한다. 품격있고 매혹적일 것"
"여자는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자격에 걸맞은 나이를 갖는다"
"패션 디자이너는 한가지를 잊고 있가. 자신이 만든 옷을 여성이 입는 다는 것을"
"진정한 우아함의 본질은 '단순함'이다"
나는 나의 삶을 창조했다. 이전 나의 삶이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리지 않지만 어리다고 느끼며 살고 있다."
내가 나이 들었다고 느끼면 침대에 눠 영원히 잠들겠다."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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