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코코 샤넬(Chanel)이 설립한 프랑스의 하이엔드급 명품 패션 브랜드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블랙핑크의 제니와 빅뱅의 리더 지드래곤이
콜라보를 하고있는 회사이기도 하며 , 매년 크리스마스때 샤넬은 지드래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낸다고 한다.
1. 코코 샤넬 역사와 로고
원어 Chanel S.A.
창립 1909년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
산업 분야 패션
본사 소재지 프랑스
핵심 인물 베르트하이머 형제
제품 오뜨 꾸뛰르, 의류, 향수, 보석, 화장품
매출액 167억 달러 영업이익 48억 달러 순이익 33억 달러
종업원 수 1,270 명 (2010년)
모기업 CHANEL limited, 베르트하이머 형제, 90%
웹사이트 www.chanel.com
1909년
26살의 가브리엘 보뇌르 "코코" 샤넬(Gabrielle Bonheur "Coco" Chanel)이
자신의 첫 가게를 파리에 열게된다.
이후 그녀는 순조롭게 패션 디자이너로서 성공의 길을 걷게 된다.
1921년
샤넬 향수로 세계 패션계의 역사적인 사업을 시작한다.
샤넬은 여성복에서 혁신을 이룬 것처럼 향수 이름을 짓는 데에서도 기존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개발된 순서에 따라 번호만으로 향수 이름을 붙였다.
당시 대부분의 향수 이름은 ‘봄의 욕망’, ‘저녁의 도취’와 같은 시적인 이름이 붙었다.
여기에 이미 파리에서 자신의 의상실이 유명하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얻고
‘샤넬’을 덧붙여 향수 이름을 짓게 된다. 로고도 직접 디자인하는데,
하나는 자신의 이름인 영문 CHANEL을 단순한 산세리프체로 디자인한 워드마크,
또 하나는 두 개의 C자가 서로 대칭적으로 놓인 로고다.
(가브리엘 샤넬은 어려서부터 ‘Coco’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 개의 로고는 샤넬이 세계 패션계에 던진 화두와 이념을 잘 드러내 보인다.
먼저, 검은색과 흰색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색의 대비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두 개의 C자가 이루고 있는 완벽한 대칭성에 여성을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옷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했던 샤넬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1924년
코코 샤넬이 라소시에트 데 파르풍 샤넬이라는 이름으로 유대인 사업가인
베르트하이머 형제와 세운 회사였다.
샤넬의 수익 분배 구조는 모든 투자금을 유치한 베르트하이머 형제 70%, 코코 샤넬 10%,
프랑스의 백화점 갤러리 라파예트 10%라는 구조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되자 코코 샤넬은 밀월
관계였던 13연하의 귀족 출신 독일 장교 한스 귄터 폰 딩크라게에게 샤넬 브랜드의
소유권을 빼앗아달라고 요구하면서 코코 샤넬은 나치 독일의 스파이 활동을 했다.
하지만 베르트하이머 형제는 코코 샤넬의 배신을 예상하고 친구 펠릭스 아미오의
비행기 제작 회사 아비옹스 아미오의 50% 지분을 매입한 뒤 소유권을 그에게 넘겼으며,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뉴욕으로 피신했다.
샤넬 '나치 독일 스파이 시절'
2014년 TV 다큐멘터리《의혹의 그림자》(L'Ombre d'un Doute)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France 3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의혹의 그림자》에서
그녀가 나치의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문서가 발견됐다고 방송됐다.
요원 번호는 F-7124, 무려 스파이 암호명까지 발급받은 최고위급
스파이였는데, 암호명은 웨스트민스터.
당시 만나던 연인이 2대 웨스트민스터 공작인 휴 그로스베너였다.
영국의 국회의원이었으며 유명한 불륜 관계였다.
1924년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보석 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쥬얼리를 발표했다. 원래 코코 샤넬은 편한 옷을 위한 실용주의자였기 때문에
과한 보석과 장신구를 싫어해서 '목에 거는 수표'라며 비아냥댔지만, 진주를 발견한 뒤 인조진주를 섞어
패션의 일부, 악세사리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그 전까진 '부모가 물려준 보석'이나 '남편이 준 과한 보석'을
목에 걸었는데 여성이 주도적으로 목걸이를 패션 아이템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된 것. 무게도 훨씬 가벼워졌다.
1925년 샤넬 로고 정식 등록
샤넬의 로고는 향수와 화장품, 욕실용품에만 사용되었고 상표들은 정식 등록되었다.
1934년
기업으로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했다.
이듬해엔 양장 전문점도 오픈했다.
샤넬 슈트도 발표해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샤넬은 공작과 헤어져 여러 디자이너 및
유력자들과 사귀었는데 그녀와 사귄 남자들은 모두 급사하거나 파산했다.
1939년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 투쟁을 벌였다.
요즘과 비교해 가혹했던 노동 조건이었던 2차대전 이전의 사회적 기준으로도 처우가
가혹해서 벌어진 일인데, 샤넬은 이에 충격을 받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대신 직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해버리고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사업을 접기로 하면서 일시적으로 은퇴했다.
1940년
샤넬은 독일과 프랑스가 휴전을 한 이후 나치의 비밀경찰과 가까워지면서 스파이가 된다.
1941년
코코 샤넬은 계획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아미오의 샤넬 소유권이 가짜라고 주장하며
샤넬의 소유권을 자신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독일군은 자신들에게 군수 물자를
공급하는 아미오와의 관계가 틀어질 것을 우려하여 이를 거부했다.
1941년 여름
샤넬은 독일 방첩국에 의해 첩보원으로 발탁되었다.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서
나치의 요원으로 쓸만할 인물을 탐색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샤넬은 독일 스파이로 잘 알려진 바론 한스 귄터 본 딩클라게
(Baron Hans Günther von Dincklage)와 사귀었었다.
한편 샤넬의 행적을 고발한 'Sleeping with the Enemy,
Coco Chanel and the Secret War'라는 책은 애초부터 그녀가 반유대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나치 스파이였으나 증거 불충분이라며 풀려났다.
그 이유 중에는 물론 그녀가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게 아니었던 점도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처칠을 비롯한 영국 및 여러 유럽 상류층과 인맥이 있었고
그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업자인 피에르 베르트하이머부터 일단은 도망갔다 돌아와서 다시 회사를 되찾았다.
다만 나치 패망 이후 이야기라 전범 재판의 선후관계를 알아봐야 이다.
샤넬의 제품은 그때 당시 미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샤넬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럽에 들어온 미국 병사들을 위해 NO.5(향수)를
푸는 등의 이미지 마케팅을 세웠다.
코코 샤넬이 나치에 협력한 이유 중 가장 근거있는 부분으로는 그녀의 파트너이자
코코 샤넬에게 향수로 큰 돈을 벌게 해준 사업파트너 피에르 베르트하이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샤넬의 코스메틱 권리를
빼앗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 유태인이었던 베르트하이머는 나치 점령기간 프랑스를 떠나고
샤넬의 생각대로 사업에서 손을 뗄 수 밖에 없었다.
피에르 베르트하이머가 샤넬의 향수 뿐 아니라 패션 사업의 첫 성공에 핵심적
기여를 하고 전후 복귀에도 엄청나게 투자해준 동업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배은망덕한 일.
사실 피에르 베르트하이머는 판단력이 빠르며 물불을 안가리는 사업가였고,
코코 샤넬이 한번 배신을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싫어하는 샤넬을
계속 후원하며 15년 뒤의 복귀도 지원했다.
2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에 사업을 명분으로 미국 출장을 간 후
잽싸게 회사를 처분하고 망명해버렸다.
그리고 피에르 대신 회사를 대신 맡고 있었던 프랑스 기업가
Félix Amiot는 나치 부역 혐의를 받았으나 당연히 석방되었다.
결국 이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샤넬은 프랑스에서 사실상 추방되었고,
베르트하이머는 프랑스로 복귀해 샤넬 브랜드를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에 샤넬은 샤넬의 브랜드 자체 및 모든 권리를 베르트하이머 가문에게 팔아버린다.
현재까지도 샤넬 브랜드는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손자 두 명이 반반씩
실소유하고 있는데 둘 모두 세계 부자 순위에서 항상 이름을 찾을 수 있다.
1943년
독일이 영국에 휴전을 제안할 때 비공식 사절로 윈스턴 처칠과 만났다.
샤넬은 전쟁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피난하거나 나치에 협조하지 않는 걸 물론
사회활동도 하지 않고 칩거한 당시 여러 유명 인사들과 달리,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장교들의 숙소였던 파리의 호텔 리츠에 장기 체류했다.
그 중에는 히틀러의 심복인 헤르만 괴링과 괴벨스 박사도 있었다.
1944년
파리가 해방될 때 코코 샤넬은 독일군과 내통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윈스턴 처칠의
도움으로 풀려났고, 베르트하이머 형제는 아미오로부터 샤넬 소유권을 돌려받았다.
1950년대 초
베르트하이머 형제는 샤넬의 대표 품목인 넘버5의 매출이 떨어지자 샤넬에게
수익금 900만 달러를 보상해주며 화해했고, 샤넬의 브랜드 가치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코코 샤넬의 잘못을 묻지 않았다. 한편 코코 샤넬은 비난이 거세지자 자신의 애인인
독일군 장교 한스와 함께 스위스로 도피했다가 후에 파리로 이주했다.
사후에는 조국을 배신했다 하여 프랑스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하기까지 했다.
2. 샤넬 디자인 특징
디자인 특징
샤넬은 여성복에 대한 유럽의 전통, 코르셋을 많이 이용하던 1900년대~1910년대의 여성복에
대해 왜 여자들은 비실용적인, 쓸모없는 복장을 고수해야 하는지 회의를 느껴
당시 애인이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고향 영국에서 남성용 정장의 소재를 여성에게 적용하여
스포티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현대적 여성복 샤넬 수트로 간단하고 입기 편한 옷을 모토로 하는
디자인 활동을 시작하여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성이 많은 옷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하는 실마리를 만들었다.
1900년대~1910년대 여자아이 패션
초경을 시작하기 이전의 여자아이에게는 무릎 길이의 치마를, 초경을 시작하여
성인 여성으로서의 대우가 시작되면 발등까지 덮는 긴 치마를 입는 것.
이것은 동서남북을 막론한 유럽의 오랜 전통이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반에 촬영된 유럽 각국 왕실이나 귀족들이 남긴 전신 사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900년대~1910년대 남자아이 패션
남자의 경우 어린 남자아이 혹은 어린 소년에게만 반바지를 입혔고,
노동력과 분별력을 갖춘 성인 남성으로 성장해야 긴 바지를 입는다.
요즘은 많이 없어졌지만 유럽 남성들이 편하다는 이유로 툭하면 반바지를 입는
미국 성인 남성들을 비웃던 시선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
여담이지만 어린 남자아이에게 반바지를 입히는 전통은 이후 한창 근대화를 추진하던
일본으로 건너가 한겨울에도 반바지를 입는 관습이 생기게 되었다.
사실 이건 샤넬의 독자적인 생각이 아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노동력 부족으로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노동력 제공이 늘어났는데, 이렇게 움직임이 많고,
기계류가 많은 공장에서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연히 치마는 짧아지고
소매는 폭이 줄거나 짧아졌다. 여기에 헤어스타일도 단발로 바뀌고 모자도 챙이 작아지게 되었다.
당연히 장시간 움직이는데 불편한 코르셋은 퇴출. 우리가 아는 샤넬 스타일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따지고 보면 근본은 공순이(...)패션인 거다. 물론 공장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귀족층 여성들의 스타일은 전혀 그런 트렌드를 따르지 않았다.
현대 여성복의 시초
실제 그녀가 디자인에 영감을 얻은 것들은 대부분 서민층의 아이템이었는데,
그렇게 모티브를 얻어 탄생한 제품들이 오늘날 명품의 최정점에 있다는 게 엄청난 아이러니.
"개인적인 원인도 있는데 원래 마르고 볼륨감이 전혀 없던 샤넬은 자기 몸매를
큰 콤플렉스로 생각하고 이를 커버하기 위한 여성적인 디자인을 많이 만들었다"
자유분방한 성격 탓에 상류층의 권유로 승마를 시작했는데, 이 승마에서 여성들은
치마를 입거나 다리를 묶어버려서 사실상 걸쳐 앉는 벤치나 다름 없었다.
여성은 말을 바지를 입고 탈 수 없었고, 바지를 입고 승마를 시작한 샤넬을 향해
사람들은 '정신이상자'라며 차별했다. 그래서 그녀가 '입기 편한 옷'을 만들었던 것이다.
장식이 생략된 옷의 본체에 브레드나 코드의 테두리를 붙이고, 당시에는 보기 드문 크고 작은
색유리나 크리스털 글라스의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였다.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활동적이고 여성미가 넘치는 샤넬 스타일은 유행의 변천 속에서도 별로
변함없이 오늘날에도 애용된다. 또, 그녀가 선택한 향수인 샤넬 No.5도 유명하다.
마릴린 먼로가 생전에 자기는 이것만 입고(뿌리고) 잔다고 해서 더 유명해졌다.
향수 '샤넬 No.5'
1920년대 초 가브리엘 샤넬은 자신의 이름을 건 향수를 런칭하려고 했고,
당시 유명 조향사였던 Ernest Beaux에게 의뢰하여 몇 가지 샘플을 건네받았다.
그 중 그녀가 선택한 향이 바로 5번이다. 그래서 제품명이 간단하게 5번이 됐다는 이야기.
3. 샤넬 제품 특징과 평가
샤넬 져지
샤넬은 명품 중 처음으로 져지 원단을 옷에 활용했다. 당시 남성들의 내의에나 사용하던
져지를 명품에 사용한다는 것을 최초에 옷을 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비싼 돈을 주고 신축성이 있는 소재의 옷을 사면 안 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세계 1차대전이 벌어지자 전쟁 지원 생산활동에 투입된 여성들이
구김과 상관없이 신체에 맞는 옷을 입고 기존 남성들의 일자리에 투입되어야 했다.
전쟁에도 여성들은 패션에 대한 욕구를 버리지 않았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싫어하는 샤넬의 취향이 딱 맞아 떨어진 것.
샤넬 트위드
트위드 소재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전통 의복에 사용되던 양모사 등을 촘촘하게 짠 옷감.
보풀이 일어나기 쉽고, 뻣뻣한데다 거친 느낌을 줘 옷에 잘 활용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올드하다는 이미지 때문에 명품과는 거리가 있었던 이 트위드가 '습기에 강하다'는 사실을 안
샤넬은 과감히 트위드 의상을 선보인다.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열애 중일 당시 샤넬은 스코틀랜드 여행을 즐기다
트위드 소재를 만났고, 거칠고 단단하지만 우아하기에 여성복으로도 만들 수 있겠다 확신했다.
이후 그녀는 공방의 공예가들에게 스코틀랜드 목초지대의 식물과 아름다움을 품은 컬러에서
영감받은 탁월한 색조를 연출해줄 것을 요청했다.
트위드는 더 이상 야외 활동에 한정되지 않고 샤넬 수트로 거듭나 도시적인 매력을
선사하는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후 칼 라거펠트는 1983년부터 액세서리를 포함한 컬렉션의 모든 요소에 트위드를
자수 및 프린지 디테일로 사용하며 여성 패션에 예상치 못한 신선한 뉘앙스를 만들어냈다.
하퍼스 바자 코리아 참고로 이 칼 라거펠트의 디자인은 3대
샤넬 수석 디자이너가 된 버지니 비아르가 칼 라거펠트에게 트위드를 사랑하게
만들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만들어낸 것.
샤넬 향수
흙수저 자수성가의 아이콘으로 상업적 재능이나 디자인 쪽의 천재성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동시대 샤넬에 비견되는 다른 패션 천재들도 많았으며,
실제로 많은 돈을 벌게 해준 것은 자신의 사업 수완 때문이었다.
러시아에서 온 연하 남친이 향수 마니아였는데 그의 동료였던 조향사를 소개받아
서유럽 최초로 알데하이드를 향수에 이용하여 인공 향수를 내놓았다.
패션업계의 최초였고, 조향 시스템도 최초였고, 부케 향기도 최초였다.
그녀의 사업 수완은 다른 곳에서도 알 수 있다.
이 향수 사업을 적극 추진하면서 샤넬은 입소문 마케팅을 이용,
당신에게만 몰래 주는 선물이라며 고위층에게 은밀히 전달해 입소문이 나게 했다.
당연히 돈이 많아도 구매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제발 사게 해달라며 매장을 찾아오거나, 줄을 서는 손님들에게 ‘선심쓰는 척‘
대량 생산한 향수를 판매해 높은 수익을 올렸다.
판매 수완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향수 공병을 프랑스의 커다란 궁전의 각진 모습을 형상화 하여
프랑스의 미를 강조했다. 병 속에 담긴 금빛 액체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평행육면체의
단순한 유리병 모양 또한 혁신적이었다. 또한 ‘수리르 다브릴(4월의 미소)’,
‘데지르 프랭시에(봄의 욕망)’ 등과 시적인 향수 이름과는 달리 자신의 이름에
자신의 행운의 숫자라고 생각하는 ’5'를 내세운 것도 획기적이었다.
가히 현대 여성사를 바꿨다고 할 수 있다는 것.
또 향수는 현재 가치로 500~700만원에 팔리던 드레스와 달리 5만원 안팎에
팔렸기 때문에 더 많은 소비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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