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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패션

프랑스 명품 브랜드 설립자 '코코 샤넬' 의 생애와 사망하기까지

세계 패션 역사에, 특히 여성복과 실용성이라는 부분에 한 획을 그은 패션 디자이너이지만,

자국 프랑스에서는 과대평가 논란이나 나치 스파이 등 여러 면에서 비판받는 인물인

코코 샤넬의 생애와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되돌아 보자.

 

출생 1883년 8월 19일 –  사망 1971년 1월 10일 87세로 생을 마감하기전까지

그녀는 프랑스의 대표 패션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였습니다.

샤넬 브랜드의 설립자이자 이름과 같은 그녀는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스포티하고 캐주얼한

시크함을 여성적인 스타일의 표준으로 대중화시킨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코코 실루엣"을 우아함을 희생시키지 않고 더 단순하고, 입고 벗는 데 훨씬

덜 시간이 걸리고, 더 편안하고, 더욱  비싼 스타일로 대체하게 됩니다.

그녀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의 목록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패션 디자이너이며 , 패션 크리에이터인 샤넬은 자신의 영향력을 꾸뛰르

의상을 넘어 보석, 핸드백, 그리고 향수에 대한 자신의 미적 디자인을 실현했습니다.

그녀의 대표적인 향수인 샤넬 No.5는 상징적인 제품이 되었습니다.

 

 

1. 코코 샤넬( Coco Chanel) 프로필

본명 Gabrielle Bonheur Chanel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

출생 1883년 8월 19일 프랑스 페이드라루아르 멘에루아르 소뮈르

사망 1971년 1월 10일 (향년 87세)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신체 169cm

직업 패션 디자이너, 사업가, 간첩

수상 니먼 마커스 워드 (1957) 

 

샤넬 어린시절 

1883년 8월 19일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출생하였다.

코코 샤넬은 3남 3녀 중 첫째였는데 그리도 싫어하는 아빠는 외도를 일삼았고,

엄마와 만날 때마다 강제로 임신을 시켜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가난에 시달리던 샤넬의 엄마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샤넬을 포함한 아이들은 수도원에 맡겨지게 된다.

 

 

그녀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현대 여성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자

연인들에게 둘러싸여 독립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삶을 살아간 여인이 되었다.

단순히 여성들의 패션을 바꾼 대단한 사람 수준으로 서술되었으나,

12남매와 아내 잔 보뇌르를 두고 외가에서 받은 돈을 유흥가에서 흥청망청 날려먹고

가족을 버린 아버지 때문에 유년기를 수녀원에 버려진 채 보냈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자존심이 강하여 평생 남자들에게 도움받기를 매춘에 비유하여 꺼렸고, 패션,

에티엔의 여자들에게 모자를 만들어 주기 전에는 노래와 춤, 승마를 익히는 등 패션의 대모

이전에 대하 소설을 연상케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기도 했다.

 

 

 

코코 샤넬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남는다.'

 

코코 샤넬 의 모토

'모든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을.'

상당히 의미가 깊은 모토이다. 코코 샤넬이 최초로 여성용 바지를 만들었을 때,

여성복에 대한 유럽의 전통은 이후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비실용적인 모습에 미를 추구한 복장이었다.

이에 실용성을 담은 여성용 바지를 고안하여 만든 샤넬은 새로운 아름다움의 바탕을 만듬과 동시에,

유럽의 비실용적인 전통적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자는 의미와 여성의 아름다움을 비실용적인

전통적 미의 기준에 끼워넣어 폄하하지 말자는 의미를 세상에 던진 셈이다.

젊은시절 샤넬

 

2. 샤넬 패션 디자이너 시절

 

1913년

드뷜에 2호점을 개설한 샤넬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메종 드 꾸뛰르'를 오픈했다.

 

 

메종 샤넬의 설립자

흔히 알려진 '코코'라는 이름은 샤넬이 가난하던 시절 변두리 술집에서 노래 부르고

하던 시절에 자주 부르던 'Ko Ko Ri Ko'와 'Qui qu'a vu Coco dans le Trocadero'라는

노래의 가사에서 따온 예명이다. 본인은 성공한 후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본명 대신  코코 샤넬이라 부르는 걸 죽을 때까지 아주 싫어했지만

미국에 그렇게 알려져서  결국 이름이 굳어버렸다. 

 

 

1916년

콜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샤넬은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되었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아서 카펠과 얼마동안 동거 하게 된다.

 

 

1919년

동거인 카펠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샤넬은 다시 혼자가 되게된다.

이때 샤넬은 카펠을 잃은 충격이 컸는지, 집의 인테리어를 모두 검은색으로 바꿔버리고,

옷과 악세서리도 검은색 위주로 디자인하기 시작했는데, 카펠의 죽음은

샤넬 브랜드 이미지를 검은색으로 만들게 한 결정적 원인이었던 셈이다.

 

 

1921년

샤넬은 파리 깡봉가 27, 29, 31번지 전체를 자신의 매장으로 채웠다.

본점을 깡봉가 31번지로 확장한 샤넬은 조향사 에른스트 보와 함께

샤넬의 첫 향수인 'No.5', 'No. 22'를 발표했다.

이때 극작가였던 장 콕토, 화가인 피카소,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연한 샤넬은 사교계의 거물이 되었다.

 

 

당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여성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 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샤넬은 로랑생의 부드럽고 몽환적인 화풍으로 묘사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인수를 거부하고 수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화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우리나라에는 1940년 작 '일 드 프랑스'가 중학교 3학년 미술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이기도

했던 인물로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의 주인공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여담으로 로랑생은 샤넬과 동갑이다.  

 

로랑생 쪽에서도 자존심이 상했는지 수정을 거부하고 샤넬을 촌x이라고 디스한 것은 덤

그대로 그림을 자신의 집에 보관했는데 로랑생 사후 초상화는 파리의 오랑제리 미술관

(Musée de l'Orangerie)으로 넘어가서 현재까지 전시 중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

15년간 샤넬은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나게 된다.

그 때 그녀는 샤넬 향수라인에만 집중했는데 이는 연락이 닿는 유일한 가족 때문이었다.

샤넬의 남은 자매들과 형제들 중 연락이 유일하게 닿던 형제가 있었는데

여동생 죽으면서 30년간 코코 샤넬은 조카의 후견인을 해줬다.

다른 형제도 1920년대 초반에 한 차례 샤넬에게 연락해 깡봉가 31번지에 찾아왔으나,

거액의 돈을 요구한 것에 실망해 샤넬이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그 당시 매장에 다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형제가 있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향수 라인만 남긴 채 조카가 있는 곳으로 피신을 간 순간

조카의 연락이 닿지 않았고, 프랑스 군으로 징집된 것이 아닌 독일 나치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더군다나 포로로 잡히기 직전 결핵에 걸려

생사를 오가는 위독한 상태였고, 코코 샤넬은 자신의 뮤즈이자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 '보이 드 샤넬'의 카펠이 사망한 트라우마로 인해 어떻게든 조카를 살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그 조카는 자살한 여동생의 아들로 알려져 있고,

샤넬은 제 자식처럼 여겼으며, 나중에는 그 자살한 여동생의 딸까지 거두었다.

그녀의 종손녀이자 대녀(goddaughter)인 이 아이의 이름 역시 가브리엘이다.

 

 

프랑스 사교계를 총동원 해서 독일에 아는 연줄을 찾기 시작했고,

이 때 조카를 풀어주기 위하여 독일에 방문해 결국 어떠한 조건을 수락하고

그 조카를 풀려나게 했다. 그 조카는 프랑스군으로 징집된 상황에서 나치 독일에 포로로

잡혀있었으니 이를 풀어주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코코 샤넬을 프랑스인들이 좋게 볼리 만무했다.

  

이후 프랑스에 돌아왔을 땐 히틀러의 부하와 연애했다는 사실이 프랑스

언론에 오르내렸고, 그녀는 반 강제로 칩거를 하게 된다.

40이 넘는 나이에 아이를 낳고 싶어 수 차례 시도했음에도

실패했던 코코 샤넬에게는 유일한 자식이나 다름 없었던 것.

코코 샤넬의 조카는 1981년 사망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크리스티앙 디오르로  대표되는 남성 디자이너들이 화려하고 사치스런 디자인으로

패션계를 장악하고 있는 모습 비판하며 샤넬은 다시금 자신의 실용주의 철학을 내세우며

패션계에 복귀하겠다는 생각을 품었지만 프랑스에서는 철저히 실패했다.

그 이후 염치도 없이 자신때문에 죽을뻔 했던 예전 동업자였던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자금과 사업 지원을 받아 드디어 1954년 샤넬 컬렉션을  선보이며 패션계에 돌아온 그녀였지만,

프랑스 언론들은 진부하고 고루하다며 그녀의 컬렉션에 혹평을 쏟아놓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반대로 '패션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할리우드의 스타들  또한 샤넬의 옷들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샤넬의 패션은 다시금 유행의 중심이 되었으며 코코 샤넬도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또 트위드라는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패션을 미국에서

유행시켜서 패션계에서 도태되는 일을 면했다.

 

 

이 역시 사실 불편한 사실이 숨어있는데 미국은 코코 샤넬의 옷을 가장 많이 헐값에 복제해

간 전과가 있었다. 무단으로 디자인을 도용해 3~6달러의 헐값에 팔았지만

코코 샤넬은 자신에게 바지를 착용하지 못하게 했던 상류층들의 4년간의 괴롭힘을 알았기에,

미국 여성들의 '편한한 옷'을 위해 저작권 소송 등을 일체 포기하고 여성의 자유로운 의복을

위하여 아예 신문에 대놓고 헐값에 카피 옷을 광고하는 것도 눈감아주고,

40년대 후반 미국 여성들의 사회 진출로 샤넬의 옷을 많이 사랑했기에 아예

샤넬 옷 따라 만들기 키트까지 집집마다 팔았다고 한다.

 

 

당시 잡지를 보면 미국에서도 샤넬이 있는 집과 없는 집으로 나뉘었고,

집집마다 옷을 따라서 만들어 입으면서 샤넬 덕분에 미국에서 여성들이

직업을 가질 때  '편한 복장'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식의 평가는 사실 자신의 스파이 활동을 모두 알고 있던 미국에서

문제를 일으켜 완전히 매장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3. 샤넬 사망

1971년 샤넬 사망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샤넬은 가슴이 답답하다며 문을 열라고

가정부에게 말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으며 갑작스레 사망했다.

프랑스에서는 코코 샤넬이 나치 부역 혐의에 대해 제대로 된 전범 재판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국 땅에 묻히는 것을 불허했고 결국 샤넬은 망명지였던

스위스 로잔에 묻히면서 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969년 샤넬
1969년 샤넬
1969년 샤넬
1970년 샤넬

3. 샤넬의 평가 

2004년 10월,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샤넬은 자신의 생활 방식을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삼아 현대 여성의 모습, 행동,

옷 입는 방식 등을 제시했다.  소년 같이 슬림한 몸매와 짧은 헤어스타일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그을린 피부와 활동적인 생활 방식, 경제적 자립

또한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다. 샤넬은 자기 삶의 태도와 스타일을 마케팅하며

자신의 경력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20세기 여성들의 취향을 형성했다.'

 

앙드레 말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이름 3개, 드골, 피카소, 샤넬'

 

 

재판받지 않은 전범

놀랍게도 그녀의 고향인 프랑스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녀의 인생 자체가

너무나도 아이러니하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모습과 실제와의 간극이 큰 대표적인 인물이다.

 

샤넬 -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나치를 열성적으로 지지하고, 히틀러를 지지한다고도 밝혔기 때문에 이 사실이 알려지고

나선 많은 비난을 받았다. 나치를 이용해 유대인이었던 자신의 동업자를 사업에서 퇴출시키려

했을만큼, 전쟁 기간 동안 나치 고위층과 친분을 유지하며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급 부역 혐의로 체포되었던 전적이 있다.

이미 프랑스는 수많은 나치 정권의 협력자들을 만 명 단위로 사형시켰던 만큼,

당연히 코코 샤넬도 부역 혐의로 처형당하기 일보직전의 위기에 처했다.

 

 

1940년

독일이 프랑스 파리를 점령했을 때 한스 귄터 폰 딩크라게와 사귄 덕분에

고급 호텔 리츠에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고, 이는 그녀의 조카(사실상 양자)가 나치 수용소에

갇히자 조카의 석방을 조건으로 아프베어에 협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친분 및 연애 역시 프랑스 사교계를 모두 뒤져 제 조카를 살리기 위해 수소문 한 것이다.

여러번 강조되지만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었기 때문.

 

 

샤넬의 과거 애인 2대 웨스트민스터 공작(휴 그로스베너)

과거 애인이였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가까운 친구인 윈스턴 처칠 수상은

이미 코코 샤넬의 친한 지인이었고,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독일인과 사귀었다는

이유로 프랑스 여성들은 말 그대로 공개 처형 형태의 삭발 및 폭력에 시달렸지만

코코 샤넬에게 면죄부를 준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공작이 샤넬이 임신을 못한다는

이유로 6년간 교제하다가 이별을 통보했고, 웨스트민스터 공작이 23살 연하 여성과

결혼하고 상실감에 빠졌을 때 윈스턴 처칠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로 도피한 뒤 10년

가까이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 했고, 그 동안 샤넬은 숨어 지내며 패션에 대한 관심을 끊게 된다.

웨스트민스터 공작 영국의 국회의원이었으며 유명한 불륜 관계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노동자들의 처우와 인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가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에서

마릴린 먼로 덕에 얻은 갑작스런 인기와 페미니즘 운동의 이미지 덧입히기의

혜택을 크게 봤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코르셋 해방이 없었다면,

처음 승마를 할 때 여성 중 최초로 바지를 입지 않았다면,  엉덩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양 발을 묶는 디자인의 옷에서 해방시키지 못했다면 지금의 리틀 블랙 드레스는 없다.

이 리틀 블랙 드레스가 없었다면 아무도 다리를 내놓은 채, 간단한 디자인으로 옷을 입지 못했을 것이다.

 

 

샤넬의 사생활

사생활 또한 좋게 말하면 세기의 연인들에 둘러싸인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매우 복잡하였다.

스스로의 삶을 개척한 신여성처럼 포장되지만 실제 코코 샤넬의 삶은 재벌급 상속자, 귀족,

정치장교들을 스폰서로 삼아 그들의 자금과 인맥을 활용해 사업을 키우고 성공시키는 식이였다.

나치 부역 혐의로 위기에 처했을 때도 전 애인의 도움으로 빠져나왔다.

물론 그 전 애인을 밀어내다가 왕세자까지 대동해서 샤넬을 설득했고,

자신은 돈보다 사랑이라며 그가 주는 값비싼 보석을 보내면 코코 샤넬은

그 보석에 똑같은 비용의 돈을 얹어 반송할 정도로 남자를 믿지 않았고,

돈으로 내 마음을 살 수 없다고 거절해왔다. 유부남과 사귀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몇 차례의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나갔다.

샤넬이 임신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다. 

 

 

샤넬과 패션 디자이너들

당시에 같이 활동했던 대부분의 패션 디자이너들하고 사이도 안 좋았다.

동시대에 활동하던 디자이너들의 물건을 보고 진부하고 한심하다며 공개적으로

어그로를 끌고 다녔고, 특히 당시 세계 패션의 정점이던 폴 푸아레와 사이가 안 좋았다.

폴 푸아레는 우아하고 여성적이지만 덜 실용적인, 파티에 입고 갈 옷을 만들었다.

샤넬과 정반대의 디자인을 한 사람. 하지만 그는 자타공인 세계 패션의 왕이었고,

여성복에서 최초로 코르셋을 뺀 장본인이기도 하다. 다들 그것을 샤넬의 공으로 알고 있지만

최초는 그. 코코 샤넬이 코르셋을 없앴다고 알려진건 미국에서 잘못 알려진 이미지로

일부러 마케팅적으로 거짓으로 그렇게 이미지를 구축한 면이 있다.

이런 이미지는 미국의 전후 페미니즘 유행과 더불어 사업적으로 상승 효과를 냈다.

그 밖에 엘자 스키아파렐리하고도 라이벌이 되어 그녀를 싫어했으며,

파코 라반을 보고 금속공이나 다를 바 없다고 비하했다.

 

엘자 스키아파렐리

초현실적이고 예술적인 옷의 대가. 역시 샤넬의 철학과는 맞지 않았다.

엘자의 손녀 가운데 모델 겸 사진작가로 활동한 베리 베린슨은 영화 싸이코로

유명한 명배우 안소니 퍼킨스와 결혼했는데 안타깝게도 911 테러 당시

아메리카항공 11편에 탑승했다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반대로 이브 생 로랑을 두고는 자신의 정신적 후계자라며 칭찬했다.

후에 엘자 스키아파렐리가 은퇴하자 그제서야 인정하는 말을 했다.

 

샤넬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예술로 생각했고, 그녀만한 창의성을 가진 이가 없었다." 

디자이너 엘자 스키아파렐리

 

파코 라반

재질을 초월해 옷을 만드는 전설급 디자이너.

 

파코 라반

 

한마디로 미국 타임지에서는 20세기 100대 인물로도 선정될 정도로 크게 인정받는 유명인사지만,

그녀의 인생과 철학에 대해 속속들히 잘 아는 본국 프랑스에서는 그리 평가가 좋지 못하다.

단적으로 프랑스 대표 훈장 레지옹 도뇌르는 사회 각계 각층에서 업적이 있는 프랑스인 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수여하는 훈장으로 크리스티앙 디오르, 이브 생 로랑, 위베르 드 지방시,

엠마누엘 웅가로, 잔느 랑방, 피에르 발망 등 유명한 남녀 패션 디자이너들이 수상했고

외국인이자 샤넬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도 2010년 수상하기도 했지만, 정작 샤넬의 창시자인데다

인지도 또한 가장 높은 편인 코코 샤넬은 생전에도 그리고 사후에도 받지 못했다.

 

 

프랑스 출신의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지만, 2차대전 기간동안 나치 스파이 활동,

히틀러 측근과의 교제 등으로 인해 프랑스의 땅에 묻히지도 못했다.

대신 마케팅적으로 이미지가 세탁된 후 진출한 미국에선 여성 근로자들의 패션을

획기적으로 바꿔줬기 때문에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양면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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